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 (아툴 가완디) (2024)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

작가
아툴 가완디
출판
동녘사이언스
발매
2003.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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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쓴 책 중 단연 최고.

소문이 자자하던 이 책을 하와이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야 비로소 읽게 되었다. 과연 명불허전. 현대 의학의 몇몇 핵심 주제들을 말콤 글래드웰도 울고 갈 기가막힌 글솜씨로 풀어놓은 책이었다. 적어도 의학이라는 전문분야에 대한 글쓰기에 있어서는 글래드웰보다 몇 수 위였다. 물론 글래드웰은 어떤 주제로도 글을 쓸 수 있는 '제네럴리스트'라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집에 와서 찾아보니 이 책의 저자 아툴 가완디는 하버드 의대에 진학하기 전에 스탠포드 학부를 졸업했고, 그 유명한 로즈 장학생으로 뽑혀 문과 전공의 꽃 옥스포드의 PPE(철학, 정치학, 경제학) 과정을 마쳤으며, 20대 후반의 나이에 빌 클린턴 정부의 의료 개혁에 참여하기도 한, 정말 대단한 경력을 자랑하는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난 놈'이란 얘기다.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기계적 완벽성을 추구하는 과학으로서의 현대의학'과 '환자 개개인의 특이사항을 고려하는 개별적, 직관적 접근 방식으로서의 전통의학' 사이의 갈등 내지 대립 관계이다.

의료 행위에 있어서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는 전문화와 자동화, 즉 하나의 질환만 전문적으로 치료하면서 컴퓨터 알고리즘을 더 많이 도입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 최근 힘을 얻고 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담당 의사가 모든 책임을 지는 도제식 시스템보다는 ('문제의 책임은 항상 자신이 져야 한다'는 성산 장기려 박사의 신조는 알고 보니 외과 의사의 전통적인 수칙이었다.) 의료 행위의 모든 단계를 하나하나 분석하고 개선하는 일반 기업체의 '식스 시그마' 혹은 'process re-engineering'적인 접근이 의료 사고를 줄이는 데 더 효율적이라는 주장도 결국 '과학으로서의 의학'을 강조하는 입장이다. 의료행위에서 있어서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의 활용 주장이 이미 이 책이 미국에서 나온 2002년부터 꽤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원격의료의 활성화 움직임도 결국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결국 '과학으로서의 의학'보다는 의사와 환자 사이의 친밀한 관계, 즉 '라포(rapport)'를 중시하는 '전통적 의학'의 손을 드는 것으로 보인다. 기계화와 전문화로 의료 행위에 있어서의 실수가 줄어든다면 의사에 대한 환자의 신뢰가 증가하여 오히려 '라포' 형성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논리이다. '진단은 기계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치료하는 데는 여전히 의사가 필요하다'는 문장이 이러한 견해를 대변한다. 통증, 구역증, 안면홍조 등 '과학적 의학'으로 아직 해명하지 못한 증상에 시달리는 환자들에 대한 의사의 전적인 이해와 지지를 강조한 대목 역시 마찬가지다.

여기서 나는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본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 독자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는(thought-provoking) 것이다.

의학에 '과학으로서의 현대의학'과 '관계를 중시하는 전통의학'의 두 가지 흐름이 있고 둘 다 중요하다면, 현재의 의학 교육 과정이 '과학으로서의 현대의학'에 너무 치우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 물론 4-5년에 걸친 전문의 수련 과정이 이러한 '관계 형성' 내지 '개별적, 직관적 접근 방식'을 배우는 과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 몇몇 의대에서도 도입한 '다중미니면접' 역시 이런 '관계 형성'에 더 치중하려는 움직임에서 나온 것으로 들었다. 하지만, 저자도 시사했듯이 과학의 발전에 의해 진단은 물론 치료 과정마저도 일부 기계화가 된다고 했을 때, 현재의 의학 교육 과정을 좀 더 '관계 형성' 위주로 고쳐 나갈 필요는 없는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혹시 여기에 동양의 전통 의학인 한의학이 공헌할 부분은 없을까 하는 '위험한 상상'도 했다.

통증, 구역증, 안면홍조 등의 경우에 있어서 환자의 입장을 십분 이해하는 '라포' 중심 전통 의학의 역할은 결국 현대의학이 더 발전하여 이러한 질환의 원인을 규명할 때까지의 과도적인 부분에 머무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물론 이러한 과도기가 수십 수백년 동안 계속될 수도 있으며, 현대의학이든 '라포' 든 간에 환자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 의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일 것이다. 안면 홍조와 비만-식탐 (이것 역시 현대의학으로 원인을 규명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의 치료에 있어서 외과적인 수술이 효과적일 수 있음을 보여준 대목에서는 일종의 '유물론' 내지 '칼잡이(외과의사)의 자부심'이 느껴지기도 했다. 반면 천주교의 힘으로 임신오조를 이겨낸 사례는 굉장히 종교적이었고. (저자는 인도계 미국인이며, 종교가 무엇인지는 나오지 않는다.)

'과학'보다 '관계'를 중시하는 입장을 견지하다 보면 '의사도 인간이니 실수를 했다고 (의사면허 박탈과 같은) 엄벌에 꼭 처할 필요는 없다'는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물론 저자가 이런 견해를 명시적으로 나타내지는 않았다. 다만 과도한 업무로 '번아웃'이 되어 수많은 실수를 저지른 후 해고된 한 의사의 복귀 의지를 시사한 부분에서, 저자도 결국은 의사이니 의사 편을 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떠올랐다. 명백한 사망 사고는 없었지만, 정말 수많은 의료 사고를 저지른 그의 현업 복귀를 과연 환자 입장에서 환영해야 할까?

이 책의 단점이라면, 세계 최악으로 흔히 알려진, 공공 건강보험이 존재하지 않는 미국의 의료 체제에 대한 언급이나 비판이 거의 없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다만, 미국과 같은 민영 의료 체제와 비교할 때 시장에 의존하지 않는 공영 의료 체제 아래에서 의료 전문화가 더 어려울 것이라는 느낌은 들었다. 의료 전문화의 가장 큰 편익이면서 이를 이끄는 주요 인센티브가 바로 '비용 절약'일 텐데, 국가가 의료 수요와 수가를 통제하는 공영의료-국민건강보험 체제에서는 개별 환자 측면에서 '비용 절약'의 실익이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의료 전문화의 대표적인 예로 든 캐나다의 탈장 전문 클리닉 숄다이스 병원의 경우, 공영의료 체제 하의 캐나다에 소재하면서도 민간의료 체제 하의 미국 환자들을 받아 병원을 운영하는 독특한 경우이다. (책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 미국의 민영 건강보험으로 커버가 되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책 맨 끝에 나오는 '모든 의사에게는 그만의 엘리노어가 있다'는 1종 오류(위양성)를 줄이는 것이 2종 오류(위음성)를 줄이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즉 유방암 등의 과잉 검사를 막아야 한다는 (요즘 인기있는) 논리에 대한 설득력 있는 반박이었다. 봉와직염이냐, 괴사성 근막염이냐의 선택의 기로에서 저자는 2종 오류(실제로 괴사성 근막염이었는데도 봉와직염으로 오진하여 환자가 사망할 가능성)를 막기 위해 1종 오류(조직 검사 결과 괴사성 근막염이 아닌 봉와직염일) 가능성을 무릅쓰고 평생 흉터가 남는 조직 검사를 감행하였으며, 결국 환자는 정말로 괴사성 근막염 환자로 밝혀지게 된다. 빠르고 과감한 조치를 통해 엘리노어는 심지어 다리 절단 수술도 피하고 완치되었다. 물론 확률적, 과학적으로 생각하면 무리한 검사를 지양하여 1종 오류를 줄이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거의) 모든 의사는 '육감'으로 검사를 진행하여 2종 오류를 막은 기억을 가지고 있으며, 이 기억이 있는 한 '결정분석' 혹은 '의사결정 분지도'에 따른 '과학적'인 분석(즉 '숫자에 속아 위험한 선택을 하는 사람들'에 나오는 '베이지안 확률'을 사용한 분석)에 따라 1종 오류를 막기 위해 검사를 자제하라는 주장에 쉽게 승복할 수 없다는 저자의 주장에 쉽게 반박을 할 수는 없었다. 내가 저자의 글쓰기 테크닉에 넘어간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 (아툴 가완디)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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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Dean Jakubowski R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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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Dean Jakubowski Ret

Birthday: 1996-05-10

Address: Apt. 425 4346 Santiago Islands, Shariside, AK 38830-1874

Phone: +96313309894162

Job: Legacy Sales Desig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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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duction: My name is Dean Jakubowski Ret, I am a enthusiastic, friendly, homely, handsome, zealous, brainy, elegant person who loves writing and wants to share my knowledge and understanding with you.